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츠의 조피 (문단 편집) === 결혼 ===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고 조피는 오빠인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와 올케 언니 헤센카셀의 샤를로테와 함께 [[하이델베르크]]에서 살았다. 하지만 카를 1세 루트비히와 샤를로테의 사이는 파국이었고, 조피와 샤를로테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샤를로테는 얼른 조피를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조피 또한 마찬가지로 얼른 혼처를 구해 오빠의 궁정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이 조피에게 청혼을 했다. 게오르크 빌헬름은 자유로운 성격 때문에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후계자를 얻기 위해 결혼을 결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남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주고 본인은 독신으로 살겠다는 조건으로 조피와 대신 결혼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게오르크 빌헬름은 독신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나중에 '엘레오노르 드미에르 돌브뢰즈'라는 하급 귀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귀천상혼]]이어서 상속권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갖게 되었다. 게오르크 빌헬름과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훗날 [[조지 1세]]의 아내가 되는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다.] 결국 1658년 9월 30일, 조피는 게오르크 빌헬름의 남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하이델베르크]]에서 결혼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1692년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어 조피 또한 선제후비가 되었다. 조피는 오빠 카를 1세 루트비히가 헤센카셀의 샤를로테와 이혼하고 루이제 폰 데겐펠트라는 여인과 [[귀천상혼]]하는 과정에서 조카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리젤로테)를 맡아 키웠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평생 고모인 조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조피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 살면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평소 철학에 관심이 많고 지적이었던 조피는 당시 하노버 궁정의 도서관장으로 일했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친분은 조피가 1714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의 사이에서 6남 1녀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 중 2남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4남 카를 필립, 5남 크리스티안 하인리히는 모두 전투에 참전했다가 죽었다. 3남 막시밀리안 빌헬름은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몄다가 하노버에서 추방당했다. 딸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조피 샤를로테]]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정부인 클라라 엘리자베트 폰 플라텐 사이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낳았지만, 조피는 남편에 외도에 대해 당대 어느 여성처럼 그저 묵인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장남 [[조지 1세|게오르크 루트비히]]와 며느리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의 결혼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조피 도로테아의 어머니이자 조피의 동서이기도 한 엘레오노르가 왕족이나 공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치 가문의 공녀였던 조피는 하급귀족인 엘레오노르를 무시했고,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가 상속받을 재산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을 결혼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 부부가 결혼한 후에도 며느리가 귀천상혼 가문의 딸이라 에티켓이 없다고 무시하는 등, 고부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